스토리

*** 이 시대의 어른 고 김수환 추기경님을 추모하며 ***

YS벨라 2011. 11. 29. 01:11


 


*** 이 시대의 어른 고 김수환 추기경님을 추모하며 ***









이 글은 미국 LA 대교구 종신부제이시며, 찬미 사목자로 계신 원영배 부제님께서
김수환 추기경님을 추모하며 쓰신 글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
그분을 생각할 때 내 기억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느낌은
“드물게 상식을 갖춘 지도자”라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들을때면 가식이 없는 소박함과 솔직함,
특별히 전문적이거나 고상한 감각을 비치는 법이 없이
자연스럽게 세련된 문화적 취향이 배어나오는 감성을 언제나 느낄수 있었다.

1992년으로 기억한다.
그해 미국 SCRC 연례대회중에 한인신자 단체에서 주관한 집회가 있었다.
주최측은 추기경님 말씀을 듣기 위해
당연히 한인신자들이 많이 모일 것을 대비하고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외로 영어권의 미국인 신자들이 청중으로 많이 참여해서,
한국어로만 진행한다면 그들이 소외되어버릴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

그때 김추기경님은 통역자를 미리 배정하지 않은
주최측의 무심함을 탓하지 않고 즉석에서
통역을 도와줄 1.5세 한인신부를 요청해서 옆에 세웠다.
갑자기 준비된 통역자가 실수를 하거나 말이 막히자
추기경은 특유의 유머와 함께 본인이 직접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며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분의 유려한 영어표현 실력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순발력을 발휘해서
모두를 배려하는 매너에 감탄했던 기억이 새롭다.  

추기경님을 환영하는 행사가 한 호텔 연회장에서 열렸을 때
나와 함께 활동하던 찬미그룹 찬미사랑(Praisephile) 에게
나와서 노래를 해달라는 주문이 있었다.
나는 그룹의 젊은 친구들에게 “멀리 한국에서 오신 추기경님 앞이니
특별히 거룩하고 멋진 음악을 들려드려야 한다”고 당부했다.

기쁘게 모인 친구들은 추기경님과 각계 손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기타와 플룻, 피아노의 화음으로 충만한 분위기를 만들어 선사했다.
대학생이던 에이미(Amy)가 전능하신 하느님을 경배하는 노래 ‘엘샤다이’를 부를 때
성령이 깃든 고운 율동까지 그녀에게서 분향이 피어오르듯 신비스럽게 우러나왔다.

우리의 노래가 끝나자 사회자가 추기경님께
노래 한 곡을 불러주십사 부탁을 드렸다.
사람들이 박수로 열렬히 환호하고 마지못한 듯 마이크를 잡으신 그분은
미소띤 얼굴로 우리를 가리키며 “기왕 시키려면
저 사람들이 하기전에 나를 노래시켰어야지..”라고
자연스러운 농담 한마디로 우리들의 노래에 치하를 대신하셨다.
그 말씀에 모두가 폭소를 터뜨리던
화기애애한 시간은 다시 돌아보아도 참 따스하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권력자와 정치가들에게 마음을 비우라고 권고할 때도,
사회정의실천을 호소할 때도,
그리고 우리들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칠 때도
비상하고 어려운 이론과 지식을 내세워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는 법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내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편하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그대로 닮을 수밖에 없는 주님의 사도였던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권위나 지위를 이용해서 옳고 그른 편을 갈라 한편을 내치고
선을 긋는 야심찬 선동가도 아니었다.

알고보면 상식이라는 평범한 단어는
하늘로부터 받은 겸손한 지혜를 가리킨다.
예수님을 생각하면 보통 사람이 갖지 못한 특별한 능력을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 외 정치및 사회정의와 평등이라는
인간에 대한 인식과 실천이라는 면에서
가장 건전한 상식을 이룩하고 남기지 않았던가.
사랑에 기초한 상식은 완전한 지혜를 낳는다.

미국을 방문한 추기경께서 남가주 성령대회에서 미사집전을 하시며
“나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고 거듭
말씀하시던 생각이 떠올라 새삼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마치 들꽃 한묶음을 들고 연인 앞에서
소박하게 고백하듯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렇다. 그분은 가난한 양떼에게 착한 목자였을뿐 아니라
진정 소박한 연인이 되고 싶어한 것이 틀림없다.
그토록 “나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고
되풀이 고백했던 것을 되새겨보면.

그분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결코 가볍고 소박하지만은 않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 가난하고 배척받는 이를 따뜻하게 힘주어 껴안는 일.
정의와 평화가 이땅에서 입을 맞추도록 마음을 다스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모나고 험한 세상을 인내로이 돌보는 일.
추기경님이 떠난 지금 그분의 자리를 보면
그분이 하신 일들, 앞으로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그 일들의 무게가 갑자기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추기경님의 그림자는 어느새 갈바리산에 세워진
십자가 그늘에 들어 숨어있다.
추기경님이 스스로 추억하는 당신의 삶의 기억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소박한 장면은 다른 사람들도 그러하듯
먼 유년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화빵을 팔러 읍내에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물드는 노을을 지켜보던 소년 김수환의 그리움이
내 의식속에도 아련하게 스며온다.

이제 우리가 그를 그리워하며
석양이 지는 언덕의 십자가를 바라본다.

2/16/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