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음악
모짜르트는 자신에게 드리워진 죽음을 예감하며, 베르디와 포레는 가족, 친구의 죽음을 기리기위해 레퀴엠을 작곡하게
됩니다.
작곡가들은 레퀴엠을 통해서 현실적으로는 당시 사회의 주류였던 성직자 그룹에 자신의 신앙심을 과시하고,
내적으로는 더불어 신에게 바치는 최고의 작품을 헌액함으로서 자신의 죄를 보속하고자 하는 의식이 작동합니다.
그래서 레퀴엠을 쓴 음악가들은 그들의 작품 중에서 레퀴엠이 최고의 작품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죽은 사람의 안식을 위해 만들어진 레퀴엠, 하지만 산 사람이 듣고 위로를 받는 레퀴엠...
우리는 그 음악을 듣고 그냥 각자의 느낌대로 나의 삶은 어떤 모습이고 죽음에 대하는 자세는 어떤지, 한번쯤 돌이켜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글에는 레퀴엠에 대한 마지막 글과 애도혹은 추모를 위해 잘 사용되는 귀에 익은 소품 몇 곡 올리겠습니다.
Death of Aase from Peer Gynt
1974년 육 여사와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사망시 서슬퍼런 권력하에서 모든 TV, 라디오 방송은 며칠동안 계속
애도방송만 내보냅니다. 좀 외진 곳에 살아서인지 동장이 마이크로 '동민여러분, 동민여러분...'을 외치던 그 시절,
동사무소의 확성기는 아예 하루종일 애도의 내용으로 꽉 찬 라디오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근대사의 암울한
기억과 더불어 당시 가장 많이 방송에서 흘러 나왔으리라 짐작되는 이 곡에 대한 기억은 특별한 느낌을 주곤
합니다.
그리그의 페르퀸트 조곡 중 '오제의 죽음'은 Andante doloroso, 즉 비통한 안단테로 시작합니다. 바이올린이
장송풍의 비통한 주제를 연주하고 그 주제가 고조되면서 슬픔의 절정으로 이끌어갑니다. 페르퀸트의 어머니 오제가
아들이 산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 병을 얻게되며 병상에서 돌아온 페르퀸트를 맞이해 그의 허황된 이야기를
들으며 죽는 장면에 나오는 음악입니다.
지극히 간명한 슬픈 선율은 고독했던 늙은 어머니의 죽음을 잘 그려놓았습니다. 높고 풍부한 감정과 어두운 측면이
듣는 이의 마음을 절로 뒤흔들어놓는 지상 최고의 장송곡이라고 하겠습니다.
가장 슬픈 장례음악을 꼽으라면 저는 우리나라의 상여소리를 우선하겠습니다.
'인제 가면 언제오나 돌아올 날이나 일러보자
동방화개 춘풍시에 꽃이 피거든 내가 오지
어-호-어어-호 어이가리 넘차-어-호....'(진도 상여소리 중)
요즘은 화장을 주로 해 운구거리가 짧지만 옛날 장례식때 선산이라도 있는 친구들 집에 문상을 하는 경우 운구거리가
장난아니게 길었습니다. 그 전날 밤새 먹은 술은 깨지도 않고 친구 어머님 혹은 아버님의 관을 들고 논을 건너 밭을
지나 산으로 올라가며 감상에 젖어 저절로 이 곡조를 흥얼거려 '초상집에서 노래하는' 이상한 놈으로 눈총을 받기도
했습니다. 아예 잘 알면 큰소리로 선창이나 하면서 산으로 가는 길이 편했을텐데...(만약 그랬었다면 운구전문으로
많이 불려다녔을 겁니다.)
그런 분위기도 이제는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Solveigs' Song (Peer Gynt)
개인적으로는 오제의 죽음보다 더 슬프다고 생각하는 곡입니다. 페르퀸트가 오랜 여정을 마치고 지친 늙은 몸으로
고향의 오두막살이로 돌아오게 됐을 때 그를 기다리다가 이미 백발이 되어버린 솔베이그의 무릅에 엎드려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평화스런 죽음을 맞게 됩니다. 한때는 성공했지만 늙고 모든 것을 잃고 난 뒤에야 집으로 돌아오는
페르퀸트, 정말 나쁜 아들에 나쁜 남편의 모습입니다. 솔베이그가 노래하는 가사는 더 기가 막힙니다.
'....또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 그 여름날이 가면 세월이 간다. 세월이 간다. 아! 그러나 그대는 내 님일세 내 님일세.
내 정성을 다하여 늘 고대하노라 늘 고대하노라....' 그렇게 기다리던 남편은 백발이 되어서 자기를 의지하며
죽어가고...
어떻게 보면 지난날의 우리의 어머니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의 상여소리는 산자의 슬픔보다는 철저히 죽은 자의 미련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죽은자는 말머리에 뿔이나고, 까마귀 머리가 희어나지면 돌아올까, 지금 가는 길이 돌아올 수 없는 길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은 죽은 자의 논리가 아니라, 산 자의 논리입니다. 산 자의 호곡은 죽은 자가 돌아올 수 없음을
전제하는 것일 뿐, 죽은 자의 귀환을 상정하지는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네의 죽음은 체념의 과정입니다.
Jean Sibelius Valse Triste from Kuolema for orchestra OP 44
'슬픈왈츠'는 1903년에 시벨리우스가 희곡 쿠울레마의 상연을 위해 작곡한 부수음악 중 한 곡입니다. 죽음을 앞 둔
여인이 비몽사몽간에 왈츠를 듣고 일어나 자신도 모르게 환상의 손님과 환상의 왈츠를 추게 됩니다.
이윽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여인은 꿈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손님은 사라지고 문간에 죽음의 그림자만
서 있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북유럽 특유의 검고 깊은 자연을 반영하는 기괴한 분위기와 야릇한 몽상미에 찬 슬픈 왈츠는 갑자기 닥쳐올지도
모르는 죽음의 처참함이 신비롭고 원숙한 분위기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의 71세때 모습입니다.
서양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세계의 경계가 다르지 않습니다. 그네들의 죽음은 혹독하고 공포스럽습니다.
죽은 자는 심판을 받습니다. 레퀴엠은 죽은 자에게 안식을 비는 염원보다는 죄지은 자가 절대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애원에 가까운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절대자 앞에서 산 자와 죽은 자는 한 없이 몸을 낮추고, 신 앞에 무릅걸음으로
나아갑니다. 심지어 죽은 자가 갓 태어난 신생아일지라도 무조건 적인 용서를 구합니다. 원죄때문입니다.
이 두 문화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차이나기 때문입니다.
Thomaso Albinoni (1671-1751) Adagio in G minor for Strings and Organ p.1
아다지오는 느리고 평온하며 조용한이란 뜻으로 극단적인 감정표현을 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라르고보다는 빠르고 안단테보다는 느린 속도로 천천히 연주하라는 지시이며 소나타 등에 있어 느리게 연주되는
악장을 일컫는데 단순한 음악템포의 의미를 넘어 음악의 한 장르로 다루기도 합니다.
'알비노니 아다지오'는 첫부분부터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선율이 가슴을 저미게 하며 빠져들게 하는데 특히 중간에
현악기와 오르간이 한꺼번에 연주하는 클라이막스 부분에서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 합니다.
조용하고 자조적인 분위기에서 출발해 점차 고조되는 오르간의 풍성한 울림이 인상적입니다.
동양문화권에서는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는 명확하게 다르지만 죽은 자와 산 자의 세계는 서로 교통합니다.
죽은 자는 절대 다시 살아지지 않고 산 자는 죽기 전에는 죽은 자를 만나지 못하지만, 죽은 자는 그의 자손 들에게
제삿밥을 얻어먹고 자손은 죽은 자를 봉양합니다. 그리고 그 댓가로 죽은 자의 발원이 후손에 널리 미치기를 기원합니다.
서구의 죽음은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그저 무대를 옮긴 것일 뿐입니다.
지상에서 죄를 지은 자든 아닌 자든 인간은 누구나 원죄를 안습니다. 때문에 그것을 보속하기 위해 언젠가 거쳐야 할
관문일 뿐, 죽음은 영원한 삶을 얻기위한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습니다.
Ravel - 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
파반느는 16-17세기에 인기를 끌었던 우아하고 장중한 느린 형식의 무곡입니다.
라벨은 이런 파반느의 특징을 살리면서 목가적인 스타일을 견지하여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작곡했는 데
지극히 향수 짙은 서정성과 라벨의 감성적인 시선이 엿보이며 아름답고 시적인 멜로디를 보여줍니다.
라벨이 제목의 운율을 맞추기 위해 '죽은 왕녀를 위한' 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고 합니다만 작품자체로 죽은 이를
애도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추모곡으로 많이 연주됩니다.
우리네는 허구한 날 상여소리를 음반에 담아 감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양에서 레퀴엠은 슬픔과 이별의 전주곡이 아닙니다.
서양의 레퀴엠은 오히려 산 자에게도 머지않아 심판대를 지날 때를 생각케하는 삶의 경계석이 되기도 합니다.
레퀴엠은 이승과 저승, 신의 왼편과 인간의 오른편을 연결시킵니다.
때문에 레퀴엠은 최고로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숭고한 장치들로써 조합됩니다.
그래서 레퀴엠은 항상 곁에 두고 되새기는 음악이 되었습니다.
The Papal Concert Kol Nidrei for cello & orchestra Op 47
히브리의 옛 성가인 '신의 날'이란 뜻의 '콜 니드라이'란 선율을 브루흐가 변주시킨 곡입니다. 신성하고 종교적인
열정이 넘쳐나며, 동양적이고도 쓸쓸한 가락이 매우 절절한 곡입니다. 긴장된 리듬과 풍부하게 흐르는 선율 등
낭만정신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서정적인 곡으로 첼로의 명상적 음색과 꼭 들어맞는 곡입니다.
첼리스트는 린 하렐(Lynn Harrell)입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아 '세계 최대(?)의 첼리스트'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굉장히 독특하게 비브라토로 연주합니다.
손도 크고 손가락도 굵은데, 열연하면서 마음껏 비브라토를 걸면 음은 마치 부채로 부친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는....
이 연주는 1994년 4월 나치에 의해서 희생된 600만명의 유태인들의 영령에 바치는 바티칸 연주입니다.
바티칸이 유태인들의 영령들을 위해 개최한 최초의 공식적인 연주회여서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었고,
그 자리엔 요한 바오로2세 교황과 로마의 수석 랍비가 참석하였습니다.
여기까지 글은 다음카페 해가 비치는 숲(cafe.daum.net/hejorim)님과 싸이월드 소병선 님(cyworld.com/pilami)의
글을 일부 참고하고 인용하였습니다.
글들이 꽤 길어졌습니다. 표현하지 못하고 잘못된 내용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다 못한 말들은 저 테너들이,
소프라노가, 오케스트라들이.. 합창단이 대신해 준 것으로 편하게 생각하겠습니다.
인터넷으로 글쓰기가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몇몇 사람들이 커다란 EDPS 용지에 숫자로 찍은 모나리자의 그림을 들고 컴퓨터학원을 다니던 시절,
도스를 이해못한 우리는 주산의 마지막 세대가 되고 컴맹의 첫세대가 될 줄 알았습니다. 윈도우의 등장은 우리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당장 글쓰는 것만 해도, 편지를 쓰고 종이글로 의사소통을 해야했던 시절에는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글을 쓰고,
어렵게 자료를 찾고 그 글이 상대방에게 정확하게 전달이 되도록 행간을 잡고 끙끙거렸습니다.
이제는 검색의 기술이 글쓰기의 반이상을 차지한 느낌입니다. 내 생각보다 좋은 생각들이 인터넷 상으로 떠돌고,
더 좋은 표현과 영상들을 찾아내면서 자연히 그 검색물들을 짜집기하는 능력이 글쓰기의 수준을 결정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풍부한 정보는 글쓰는 이의 창조능력과 상상력을 저해시키는 장애요인도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칫 나도 모르는 소리를 하지않게, 공감되고 이해되는 내용들만 가져오고 오류없이 최대한 내 표현을 많이
쓰려고 했는데도 막상 완성한 글을 보니 내 생각의 양은 얼마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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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 영국에서 장례식장에서 가장 듣고 싶은 노래를 조사했습니다.
모짜르트의 레퀴엠을 제치고 로비 윌리암스의 'Angels'가 1위를 2위는 프랭크 시내트라의 'My Way'가 차지했다고
합니다. 분위기 전환용으로 그 두 곡을 올려드리겠습니다.
마이웨이는 시내트라와 파바로티가 같이 부른 곡입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윌리암스야 정신없어 못죽겠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