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에 쓰일 곡이 나오는 1967년 레코딩된 그라모폰 레이블의 LP판이 저 다락 어느 구석엔가 있을 것 같은 데 사놓고도 차마 듣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 기회에 인터넷에서 전곡을 다 들어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작곡가들의 레퀴엠은 곡마다 종교의식의 한 부분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쓰여졌지만, 베르디의 레퀴엠은 처음부터 연주회 공연을 염두에 두고 작곡했던 것 같습니다.
레퀴엠이 지극히 종교적인 음악이지만 그는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혹은 예술적인 것과 대중적인 것등으로 분류하여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고, 단지 그는 오페라를 쓸 때에 작가의 대본에 표현된 의미들을 그대로 음악적으로 표현하기를 원했던 것처럼, 레퀴엠에서도 성서와 기도문에 내포된 의미들을 그대로 표현해 내고자 했습니다. 오로지 중요한 차이는 그가 오페라처럼 대사를 수정하기 위해 작사가를 괴롭힐 수가 없었다는 것 뿐이었겠죠.
베르디 레퀴엠의 구성
제1곡 : 레퀴엠과 키리에(Requiem & Kyrie) - 입당송
제2곡 : 진노의 날(Dies irae)
제3곡 : 봉헌송(Offertorio)
제4곡 : 거룩하시도다(Sanctus)
제5곡 : 하느님의 어린양(Agnus Dei)
제6곡 : 영원한 빛을 (Lux aeterna) 영성체송
제7곡 : 나를 용서하소서 (Libera me) 사도문
음악적으로 이 곡을 설명하는 것은 능력 밖이고 이 곡을 좀 더 자세히 보실려는 분은 해설과 전 곡의 영상이 있는 여기를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cyworld.com/pilami/3277393
지금부터 올리는 영상은 1967년 녹음된 카라얀(1908 - 1989)이 지휘하고 당시 최고였던 4인의 독창자와 120명의 합창단, 110명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한마디로 음악적 내용과 규모면에서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좋기는 한데 너무 길어질까봐 제2곡 진노의 날 중에서 저한테 인상적이었던 부분만 올려보겠습니다.
나머지는 위의 링크 주소에 가시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제2곡 진노의 날(Dies irae)
가장 긴 악장이며 중세의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작시한 것으로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합니다.
아무래도 이 부분에서 작곡가의 상상력이 제일 많이 발휘가 되나 봅니다. 모짜르트 레퀴엠도 그렇고 우리에게 익숙한 곡이 대부분 여기에 있습니다.
제2곡을 다시 쪼개어 보면 1) Dies Irae 진노의 날 2) Tuba mirum 심판의 나팔소리 3) Liber scriptus 적혀진 책은 4) Quid sum miser 가엾은 나 5) Rex tremendae 위엄의 왕이시여 6) Recordare 자비로운 예수여 7) Ingemisco 나는 탄식한다 8) Confutatis 심판받은 자들 불꽃에서 9) Lacrimosa 눈물의 날 로 이루어져 있으니 제목만 가지고도 전개되는 이야기를 대략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1) Dies Irae - 진노의 날 (합창)
Dies irae, dies illa 진노와 심판의 날이 임하면
Solvet saeclum in favilla, 다윗과 시빌의 예언따라
Teste David cum Sibylla 하늘과 땅이 모두 재가 되리라
Quantus tremor est futurus 하늘과 땅이 모두 재가 되리라
Quando judex est venturus 천상에서 심판관이 내려오실 때
Cuncta stricte discussurus 인간들의 가슴은 공포로 찢어지리
Karajan - Verdi: Messa da Requiem | Dies Irae | Part 2
이 곡은 드라마나 영화에 많이 삽입되기도 하는 곡입니다. 불멸의 이순신에도 나왔다고 하는 데 찾을 수는 없구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될 때나 클라이막스에서 많이 쓰이는 곡입니다.
최후의 심판의 무서움을 말하는 폭발적인 연주 뒤에 합창이 속삭이 듯 'Quando Judex est venturus 심판자가 오실 때'라고 반복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헉! 합창단에 무서워 보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2) Tuba mirum - 심판의 나팔소리 (베이스와 합창)
Tuba mirum spargens sonum 놀라운 나팔소리가
per sepulchra regionum 세상의 모든 무덤 위에 울리며
coget omnes ante tronum. 모든 이를 보좌 앞에 모으리라
Mors stupebit et natura, 심판주께 답변하러
cum resurget creatura 모든 피조물이 깨어날 때
judicanti responsura. 죽음이 엄습하고 만물은 진동하리
Karajan - Verdi: Messa da Requiem | Tuba mirum | Part 3
무대 위의 트럼펫 4개와 떨어진 곳에 있는 트럼펫 4개가 죽은 자를 불러 깨우는 전율의 순간을 연출합니다.
이윽고 폭풍우가 지나간 듯 한 후에 조용해지면 죽음의 발소리 같은 현의 소리가 나오고 베이스 독창이 "Mors stupebit et natura 인간이 심판자에게 대답하기 위에 소생할때 죽음과 자연은 놀랄 것이다'하고 'mors 죽음'이라는 말이 나올 때 마다 잠시 멈추면서 강한 인상을 주며 노래합니다.
무시무시한 저 베이스가 불가리아 출신의 니콜라이 기아우로프(1929-2004)입니다. 2차대전후 가장 뛰어난 베이스로 강력하고 웅장하면서도 감미로운...
(4) Quid sum miser - 가엾은 나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테너)
Quid sum miser tunc dicturus, 어린 인간은 무엇을 탄원하며
quem patronum rogaturus 누가 나를 위해 중재할까
cum vix justus sit securus? 자비가 필요한 그때는 언제일까?
Karajan - Verdi: Messa da Requiem | Quid sum miser | Part 5
파곳의 분산화음에 이끌려 메조가 'Quid sum miser tunc dicturus 그때 가엾은 나는 어떤 변호자에게 부탁할까'하고 노래합니다. 이어 소프라노와 테너가 가담하여 3중창이 되고 파곳과 현의 합주를 배경으로 고혹적인 장면을 전개합니다.
저 시니컬해보이는 메조소프라노가 그 유명한 이탈리아의 피오렌자 코소토(1935- )입니다. 전설의 칼라스와의 일화들로도 대중에게 많이 회자되는.. 순도높은 풍부한 성량....성격은 무지 까칠한....20세기 최고의 메조소프라노입니다.
소프라노 - 흑진주 프라이스로 불리는 레온타인 프라이스(1927- )는 클래식 음악계에서 진정으로 흑인의 벽을 깬 사람입니다. 이 음반도 그녀에게는 기념비적인 음반인데 독재자 카라얀조차도 프라이스야 말로 칼라스에 견줄 수 있는 위대한 존재로 인식했다는 군요. 이 음반의 경우, 결코 한 자리에서 만나기 어려운 4명의 세기의 명가수 중에서도 평론가들은 프라이스가 유독 찬란한 광채에 휩싸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극찬을 합니다.
테너가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너무 젊을 때의 모습인가요..저 테너는 나이가 들면 머리카락이 올라가는 대신 수염이 내려오겠고, 살이 많이 찔 것으로 보이는 군요...
루치아노 파바로티(1935 - 2007)입니다. 32살때의 청년 파바로티의 모습이 조금 낯설었습니다.
(5) Rex tremendae - 위엄의 왕이시여 ( 독창과 합창)
Rex tremendae majestatis 위엄과 공포의 왕,
qui salvandos salvas gratis, 값 없이 우리를 구하시니 긍휼의 근원이시여,
salva me, fons pietatis. 그때에 우리를 도우소서
Karajan - Verdi: Messa da Requiem | Rex tremendae | Part 6
이제 독창자가 4명이 다 보이는군요.
'Salva me, fons pietatis 나도 구해 주소서, 자애의 샘이여'
(9) Lacrimosa - 눈물의 날 (독창과 합창)
Lacrimosa, dies illa 눈물과 슬픔의 그날이 오면!
qua resurget ex favilla 땅의 먼지로부터 일어난
judicandus homo reus 심판받을 자들이 주 앞에 나아오리
huic ergo parce Deus 천주여 자비로써 그들을 사하소서
pie Jesu, Domine, 긍휼의 주 예수여 축복하사
dona eis requiem. 그들에게 당신의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Amen. 아멘
Karajan - Verdi: Messa da Requiem | Lacrimosa | Part 10
다른 곡들은 혹 넘어가시더라도 이 곡만은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전곡 중에서 가장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부분입니다. 메조와 베이스의 소리가 저는 너무 좋습니다. 'Lacrimosa dies illa 죄 있는 자가 심판 받기 위해서 먼지에서 소생하는 그날이야말로 눈물의 날이다.라고 메조가 노래하고 베이스가 받습니다.
이윽고 'Huic ergo parce, Deus 원하건데 신이시여, 그를 긍휼히 여기소서'하고 독창과 합창이 나옵니다. 레퀴엠과 기도를 마친다음 밝은 화음으로 아멘을 부르고 조용하게 맺는 제2곡 진노의 날의 마지막 곡이고 그야말로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올리겠습니다.
카라얀의 지휘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음악의 한부분입니다.
저런 표정과 몸짓을 해내니 어떻게 인기가 없었겠습니까?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와 성공을 거뒀으나 그로부터 얻어진 제왕적 권력으로 인한 수많은 일화들, 깊이 있는 음악과 사실적 해석에 주력했던 동시대의 다른 위대한 지휘자 칼 뵘과 비교되는 다소 싸늘한 음악적 평가 등 그가 필요이상으로 호된 비판을 받는 데는 나치에 부역한 그의 전력과 그가 거둔 성과가 너무 화려한 데 대한 세인의 질투도 한 몫하는 것 같습니다. 영상에서보면 지휘자가 연주자와 눈을 잘 안 맞춥니다. 카라얀은 눈을 감고 지휘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지휘도중 눈을 감으면 음악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다고 한답니다. 물론 오만한 지휘라고 많은 비판도 받구요..지휘봉도 짧은 걸 사용해서 풍부한 표정과 몸짓에 비해 굉장히 절제된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와 그 시대의 음악에 대한 숱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조금은 같은 시대를 산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영상들의 주역들은 여자들만 남고 남자들은 다 가버렸습니다. 여자들도 이제는 만만찮은 나이들이구요.
저들의 음악과 노래를 들으면서 여러가지 의미를 생각하고 감동하고 위로를 받습니다.
저들은 세상을 등지면서 그들이 노래했던 안식의 의미를 깨우치고 그것을 얻었을까요?
Dona eis requiem. Sempiternam, sempiternam requ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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