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돌이켜보자.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빈 손으로 왔으니
가난한들 무슨 손해가 있으며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으니
부유한들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달이 밝고
여름에는 맑은 바람
겨울에는 눈 내리니
부질없는 생각만 .마음에 두지않으면
이것이 인간세상의 좋은시절 아닌가.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털이가 되는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것이 아니라 불 필요한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수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생활태도가 아니다.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우리가 만족함을 모르고 마음이 불안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마음이 불안하고 늘 갈등상태에서 만족할줄 모른다면 그것은 내가 살고있는 이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주위에 있는 모든것의 한부분이다. 저마다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전체의 한 부분이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세상의 한 부분이다.
세상이란 말과 사회란 말은 추상적인 용어이다. 구체적으로 살고있는 개개인의 구체적인 사회이고 현실이다.
우리는 보이든 보이지않든 혈연이든 혈연이 아니든 관계 속에서 서로 얽히고 설켜서 이루러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이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어려운일도 어떤 즐거운일도 영원하지 않다. 모두 한때이다.
한 생애를 통해서 어려움만 지속된다면 누가 감내하겠는가 다 도중하차 하고 말것이다. 모든것이 한때이다 좋은일도 그렇다. 좋은일도 늘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러면 사람이 오만해 진다.
어려운 때일수록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덜 가지고도 더많이 존재할수 있어야 한다. 이전에는 무심히 관심갖지않던 인간관계도 더욱 살뜰이 챙겨야 한다. 더 검소하고 작은것으로써 기쁨을 느껴야 한다.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것은 어떤 사회적이 신분이나 지위,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이런 어려운 시기를 당했을때 도대체 나는 누구지?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우리가 지니고있는 직위나 돈이나 재능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그것으로써 우리가 어떤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있는가에 따라서 삶의가치가 결정된다.
잡다한 정보와 지식의 소음에서 해방되려면 우선 침묵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침묵의 의미를 알지못하고는 그런 복잡한 얽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나 자신이 침묵의 세계에 들어가 봐야한다.
우리는 얼마나 일상적으로 불필요한 말을 많이하는가 의미없는 말을 하루동안 수없이 남발하고있다.
친구를 만나서 예기할때 유익한 말보다는 하지않아도 될 말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말은 가능한한 적게 하여야 한다. 한마디로 충분할때는 두마디를 피해야한다.
인류 역사상 사람답게 살아간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침묵과 고독을 사랑한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세상을 우리들 자신마져 소음이 되어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는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으나 침묵속에 머무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발견한다. 말이 많은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어떤일을 하는 사람이든간에 그 내부는 비어있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도 하지 마라, 관도 짜지 말아라, 또 사리도 찾지 말라. 수의도 짜지 말고 평소 입던 무명옷을 입혀라, 강원도 오두막의 대나무 평상위에 내 몸을 올려놓고 다비해라. 남은 재는 오두막 뜨락의 꽃밭에 뿌려라."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며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아쉬운 듯 모자라게 살아라”
“더울 때 내가 더위가 되는 게 순리다”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여백이 본질과 실상을 떠받쳐주고 있다.
- 버리고 떠나기 에서 -
법정 스님께
스님,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내립니다. 비오는 날은 가벼운 옷을 입고 소설을 읽고 싶으시다던 스님,
꼿꼿이 앉아 읽지 말고 누워서 먼 산을 바라보며 두런두런 소리내어 읽어야 제 맛이 난다고 하시던 스님.
가끔 삶이 지루하거나 무기력해지면 밭에 나가 흙을 만지고 흙 냄새를 맡아 보라고 스님은 자주 말씀하셨지요 .
며칠 전엔 스님의 책을 읽다가 문득 생각이 나 오래 묵혀 둔 스님의 편지들을 다시 읽어보니 하나같이 한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닮은 스님의 수필처럼 향기로운 빛과 여운을 남기는 것들이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감당하기 힘든 일로 괴로워할 때 회색 줄무늬의 정갈한 한지에 정성껏 써보내 주신 글은 불교의 스님이면서도 어찌나 가톨릭적인 용어로 씌어 있는지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년 전 저와 함께 가르멜수녀원에 가서 강의를 하셨을 때도 '눈감고 들으면 그대로 가톨릭 수사님 의 말씀'이라고 그곳 수녀들이 표현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왠지 제 자신에 대한 실망이 깊어져서 우울해 있는 요즘의 제게 스님의 이 글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고, 잔잔한 깨우침과 기쁨을 줍니다.
어느해 여름, 노란 달맞이꽃이 바람 속에 솨아 솨아 소리를 내며 피어나는 모습을 스님과 함께 지켜 보던 불일암의 그 고요한 뜰을 그리워하며 무척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이젠 주소도 모르는 강원도 산골짜기로 들어가신 데다가 난해한 흘림체인 제 글씨를 늘처럼 못마땅해 하시고 나무라실까 지레 걱정도 되어서 아예 접어 두고 지냈지요.
스님, 언젠가 또 광안리에 오시어 이곳 여러 자매들과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 대조'도 하시고, 스님께서 펼치시는 '맑고 향기롭게'의 청정한 이야기도 들려주시길 기대해 봅니다.
이곳은 바다가 가까우니 스님께서 좋아하시는 물미역도 많이 드릴테니까요.
이해인 수녀님께
수녀님, 광안리 바닷가의 그 모래톱이 내 기억의 바다에 조촐히 자리잡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재난들로 속상해 하던 수녀님의 그늘진 속뜰이 떠오릅니다.
사람의, 더구나 수도자의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 한다면 자기 도취에 빠지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어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는 보다 높은 뜻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 힘든 일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주님은 항시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됩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말고 그럴수록 더욱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기도드리시기 바랍니다. 신의 조영안에서 볼 때 모든 일은 사람을 보다 알차게 형성시켜주기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런 뜻을 귓등으로 듣고 말아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수녀님, 예수님이 당한 수난에 비한다면 오늘 우리들이 겪는 일은 조그만 모래알에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옛 성인들은 오늘 우리들에게 큰 위로요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분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누리실 줄 믿습니다. 이번 길에 수녀원에서 하루 쉬면서 아침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던 일을 무엇보다 뜻깊게 생각합니다. 그 동네의 질서와 고요가 내 속뜰에까지 울려 왔습니다. 수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산에는 해질녘에 달맞이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참으로 겸손한 꽃입니다. 갓 피어난 꽃 앞에 서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심기일전하여 날이면 날마다 새날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그 곳 광안리 자매들의 청안(淸安)을 빕니다
"단지 믿지 않는다는 이유 만으로
지옥에 간다면
나는 주저없이 지옥으로 달려가
그들의 영혼을 달래주리라"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종교가 있다면
그건 친절과 배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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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 소현( 李 炤 炫)의 플래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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