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갓 쓰고 도포 두른 예수
"예수님이 내가 딴 짓 못 하고 그림만 그리게 하려고
내 두 귀를 꽉 막아버린 거야."
60년대 운보를 모셨던 제자 심경자(세종대 명예교수)씨는
스승이 호방하게 웃으며 글로 내뱉던 이 말을 생생히 떠올렸다.
"농담 속에도 늘 예수님을 두셨던 신심(信心)깊으신 분이셨지요."
이번 전시의 백미인
'예수의 생애(1952~1953)' 시리즈는 운보의 대표작 중 하나로,
어려서부터 어머니 손을 잡고 교회를 다녔던
그가 그림으로 그린 신앙 고백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기 드물게
'수태고지'
'아기 예수의 탄생'
'부활'
'승천' 등
성경 30가지 장면을 추려내 만든
성화(聖�) 연작"(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이란 점,
"예수의 일대기를
조선시대 풍속화로 굴절시킨 작품"(미술평론가 오광수)이란 점에서
예술사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걸작이다.
분명히 성화인데
그냥 보면 성경의 장면인지,
전래동화의 한 장면인지 분간이 안 된다.
배경은 조선시대의 토속적인 향리 풍경이고,
등장인물도 죄다 한복 차림이다.
예수는 아예 도포 입고 갓 쓴 선비로 재탄생됐다.
연작의 첫 시리즈인
'수태고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성스러운 자를 잉태했음을 알리는 장면이다.
서양 성화에 등장하는 날개 달린 천사 대신
'선녀와 나무꾼'에 나올 법한 선녀가 나온다.
녹색 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입은 마리아는 물레 앞에 앉아있다.
신윤복의 풍속화를 보듯 해학이 넘치고,
한없이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은
왼쪽에 천사가,
오른쪽에 성모 마리아가 앉아 있는
전통적인 서양 성화의 도상(圖像)을 따르면서
구성 요소는 한국화한 것이다.
전혀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이 두 그림은 같은 장면을 묘사했다. 성경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성스러운 자를
잉태했음을 알리는 ‘수태고지’다. 위는
운보의 ‘예수의 생애(1952~1953)’ 연작의 첫 장면이고,
아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수태고지’.
위 그림의 왼쪽 선녀는
아래 그림의 왼쪽 대천사 가브리엘을,
오른쪽 한복 입은 여인은 성모 마리아를 표현했다.
/서울미술관 제공 |
◇ 지중 미술관에서 펼쳐지는 파노라마
예수의 생애는
운보가 6·25 때 피란 갔던
군산 구암동(부인인 화가 박래현의 고향)에서 그렸다.
오광수는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상황은
2000년 전 팔레스타인의 예수가 처했던
수난(受難)과 다를 것 없다는 인식이
예수 일대기의 작화 동기였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김미리 기자
조선일보 / 입력 : 2014.01.27 23:29